[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의 세계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태권도를 수련하고 올림픽 무대에서 선수들이 메달을 다투기까지는 이름 없이 길을 개척한 수많은 태권도인들의 헌신이 있었다. 그 가운데 태국과 미국에서 한국 태권도의 씨앗을 직접 뿌리고 73년 동안 태권도 외길을 걸어온 원로가 있다. 올해 85세, 태권도 공인 9단 박동근 사범이다. 194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박동근 사범은 고창에서 성장하며 중학교 2학년 때 충무관에서 태권도를 시작했다. 뛰어난 기량과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선수로 성장한 그는 1966년 제1회 전국 중, 고, 대학 종별 태권도선수권대회 대학부 페더급 우승과 제47회 전국체육대회 일반부 페더급 우승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 한국 태권도 대표팀 주장으로 일본 원정에 나섰다. 1967년에는 대한체육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선수로서의 성공은 해외 태권도 보급의 길로 이어졌다. 대한태권도협회의 파견으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태국 방콕 국립체육대학에서 태권도를 지도하며 한국 태권도의 해외 보급에 앞장섰다. 당시 태국에서 태권도는 아직 낯선 무도였다. 그는 기술뿐만 아니라 예의와 절도, 수련의 가치를
[한국태권도신문] 오늘날 태권도는 세계 200여 개 국가와 지역에서 수련되는 대한민국의 대표 문화유산이자 세계인이 함께하는 무도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낯선 땅에서 오직 태권도에 대한 신념 하나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수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중심에는 남미 브라질에 태권도의 뿌리를 내리고 오늘날 브라질 태권도의 초석을 세운 조상민(曺相敏) 원로가 있다. 1938년 전라남도에서 태어난 조상민 원로는 청도관 계열에서 태권도를 수련했으며 1960년대 국제태권도연맹(ITF) 수석사범으로 활동하면서 해외 파견 사범 교육, 태권도 기술 보급, 교본 편찬, 교육영화 제작 등 태권도 세계화의 기초를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태권도가 아직 국내에서도 체계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는 이미 세계를 무대로 태권도의 미래를 준비한 선구자였다. 1970년 브라질로 건너간 조상민 원로는 아무런 기반도 없는 환경에서 태권도 보급을 시작했다. 그는 브라질 최초로 '태권도(Taekwondo)' 간판을 내걸고 도장을 개관하며 본격적인 보급에 나섰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가
[한국태권도신문] 한 사람의 인생이 한 시대의 역사로 기록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대한민국 태권도의 세계화 과정에서 자신의 청춘과 열정을 바치고 군 태권도의 발전과 국제 보급에 평생을 헌신한 인물. 바로 태권도 원로 창무관 출신 양해룡 9단 고문이다. 90여 년의 삶 속에서 태권도는 그의 인생이었고 사명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조국을 지켰으며 태권도인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태권도 종주국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까지 그 길 위에는 양해룡 고문과 같은 선구자들의 헌신이 있었다. 1936년 9월 24일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양해룡 고문은 어린 시절 선친의 고향인 전남 광주로 귀국했다. 광주수창초등학교를 거쳐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4·19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며 시대의 아픔과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슴에 품었다. 1960년 대학 졸업 후 국가를 위한 길을 선택한 그는 육군보병학교 갑종장교 과정에 입교했고 1961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최전방에서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고 1965년에는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베트남
[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가 오늘날 세계인이 함께 수련하는 무도이자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수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이 있었다. 그 가운데 미국 태권도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정화(鄭和, Hwa Chong) 회장이다. 정화 회장은 1939년 2월 28일 태어나 대한민국 태권도 초창기의 전통관인 강덕원(講德院)에서 박철희·홍종표 사범의 지도를 받으며 태권도의 기본과 무도정신을 익혔다. 그는 1950년대 중반 강덕원에서 수련하며 기술보다 인격을 중시하는 교육철학을 몸에 익혔고 이 정신은 평생 그의 삶과 지도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1967년 미국으로 건너간 정화 회장은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밟는 한편, 미시간대학교 태권도클럽의 지도자로 초청받아 미국 대학사회에 태권도를 본격적으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8년부터 미시간대학교 태권도클럽의 책임지도자로 활동하며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학생과 지도자를 길러냈다. 당시 그는 매주 랜싱에서 앤아버까지 왕복하며 직접 지도를 이어갈 만큼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정화 회장은 태권도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인격교육의 수단으로 이해했다. 그의 수업에서는 발차기와 품새 못
[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의 역사는 수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으로 이어져 왔다. 오늘날 태권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자 세계인이 함께하는 무도로 자리 잡기까지는 낯선 땅에서 태권도의 씨앗을 뿌리고 평생을 바친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의 발자취는 화려한 조명을 받지 않았지만 세계 태권도의 뿌리에는 언제나 그들의 땀과 열정이 스며 있다. 안경원(Kyongwon Ahn) 9단 대사범은 바로 그런 시대를 대표하는 개척자이다. 그는 미국에서 도장을 운영한 한 명의 사범이 아니었다. 태권도를 교육으로 정착시키고 미국 태권도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국제 태권도 행정과 올림픽 무대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지도자였다. 그의 삶은 한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대한민국 태권도가 세계로 뻗어 나간 역사와 함께해 온 여정이라 할 수 있다. 1937년 8월 11일 태어난 안경원 대사범은 강원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62년 졸업하였다. 법률을 공부한 그는 안정된 길보다 태권도의 미래를 선택했다. 1957년부터 국내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태권도의 정신과 교육적 가치를 전하던 그는, 대한민국 태권도가 세계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1967년 미국행을 결심했다.
[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계에는 화려한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오원걸 9단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강인한 정신과 책임감, 적극적인 실천력, 그리고 가정에 대한 헌신을 바탕으로 평생 태권도의 길을 걸어온 정통 태권도 지도자다. 오원걸 사범(69세)의 인생은 도전의 역사였다. 젊은 시절 아마추어 복싱선수로 활동하다 프로무대에 진출하며 강인한 정신력을 길렀고 이후 태권도의 길을 선택해 오늘날 세계 각국에 태권도를 보급하는 국제 지도자로 성장했다. 1988년 서울 강남구에서 보라매태권도장을 운영하며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1989년 제9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아프리카 모리셔스 코치로 활동하며 국제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국내 지도자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무대로 태권도 보급에 헌신했다. 1996년에는 청와대 초청으로 김영삼 대통령 앞에서 택견 시연을 펼쳤으며 같은 해 미국과 캐나다 순회 시범을 통해 한국 전통무예의 우수성을 알렸다. 또한 한국민속촌 택견 시연단원으로 활동하며 우리 전통무예의 보존과 전승에도 힘을 보탰다.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샌디에이고, 리버사이드 지역을 비롯해 중국 베이징
[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계에는 화려한 직함이나 수상 경력보다 더 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태권도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기(國技)이자 세계인이 수련하는 무도로 성장하기까지 평생 현장을 지켜온 원로들이다. 김정록 9단은 바로 그러한 태권도인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성문당에서 출간된 『태권도인 김정록 사범이 살아온 발자취』는 한 개인의 회고록을 넘어 대한민국 태권도 현대사를 담아낸 귀중한 기록물이다. 책 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태권도가 걸어온 길과 그 과정에서 묵묵히 헌신한 지도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37년 광주에서 태어난 김정록 9단은 1955년 광주기계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당수도 수련을 시작하며 무도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태권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당수도 시절부터 태권도의 명칭 제정, 국기원 설립, 세계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태권도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산증인이다. 그는 지도자이자 행정가로서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전남태권도협회 상임부회장, 광주광역시태권도협회장, 광주광역시생활체육태권도연합회장, 광주광역시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 태권도 발전에 헌신
[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계에는 단순히 오랜 기간 수련을 이어온 사람을 넘어 태권도의 역사 자체를 몸소 경험하고 기록하며 미래를 제시하는 인물들이 있다. 김명수 9단은 그러한 태권도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43년 충남 서산 해미에서 태어난 김명수 9단은 조선 초기에 건립된 해미읍성 인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성장했다. 넓은 평야와 바다를 품은 고장에서 사람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조부모의 가르침 속에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의와 공정,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삶의 가치로 삼아왔다. 그가 태권도를 처음 접한 것은 1958년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이후 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체육학과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태권도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만 해도 태권도는 오늘날과 같은 학문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시기였지만 그는 태권도를 단순한 무술이 아니라 인간을 수양하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문화로 바라보았다. 김명수 9단은 태권도의 본질을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스스로를 완성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승패의 결과보다 목표를 향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그의 인생관은 곧 태권도 정신과 맞닿아 있다. 대학 졸업 후 ROTC 장교
[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계에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긴 세월의 헌신으로 존경받는 인물들이 있다. 세계태권도창무관 김중영 총관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창무관 총관장, 국기원 기술고문, 국기원 교본편찬위원회 위원장, 고단자심사위원장, 해외심사심의위원, 태권도9단회 회장 등 수많은 직책을 거쳤지만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평생 태권도인’일 것이다. 그는 태권도의 태동기를 직접 경험한 세대로서 기술과 정신, 교육과 행정, 그리고 세계화 과정까지 함께해 온 살아있는 역사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시작한 태권도 인생 김중영 총관장은 1942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53년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넉넉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고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팔며 공부를 이어갔다. 어려운 시절 그가 만난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삶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고 자신을 단련하는 인생의 길이었다. 창무관 수련을 통해 태권도의 기본정신을 배우고 무도의 가치를 깨달은 그는 이후 평생을 태권도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 지도자와 교육자, 행정가와 출판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늘 태권도를 삶의 중심
[한국태권도신문] 세계 스포츠 역사에는 선수보다 지도자로 더 위대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존재한다. 한국 태권도계에서 김세혁 전 국기원 연수원장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는 단순한 감독이 아니었다. 한국 태권도 겨루기의 황금기를 설계한 전략가이자,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 태권도의 위상을 끌어올린 승부사였다. 또한 수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가능성을 꽃피우며 세계 정상으로 이끈 지도자였다. 수십 년 동안 현장에서 선수들을 길러내며 대한민국 태권도를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이후에는 행정과 교육 분야에서도 태권도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열정과 경험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특히 겨루기 경기인 출신으로 국기원 명예 9단을 수여받은 것은 단순한 개인의 영예를 넘어선다. 그것은 한국 태권도 겨루기 역사가 한 지도자의 헌신과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징적 순간이었다. 동성고의 전설, 세계를 제패한 명장 1955년생인 김세혁 전 연수원장은 동성고등학교 체육교사 시절부터 이미 태권도계에서 전설적인 지도자로 불렸다. 당시 동성고 태권도부는 전국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김세혁 감독의 이름은 곧 ‘강한 팀’, ‘이기는 조직’, ‘철저한 준비’를 상징했다. 그는 선수의 가능성을
[한국태권도신문]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LA)에 태권도의 씨앗이 막 뿌려지기 시작하던 1960년대 후반. 당시 미국 사회에서 태권도는 아직 낯선 이름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한국 무술을 ‘코리안 가라데(Korean Karate)’ 정도로 인식했고, 태권도라는 고유 명칭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 혼란의 시대에 “태권도는 태권도여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미국 사회에 정식 명칭과 철학을 뿌리내린 인물이 있다. 바로 미국 LA 도산체육관의 김용길 총관장이다. 그는 오늘날 미국 태권도사의 산증인이자, 태권도의 세계화 초창기를 몸으로 개척한 원로 사범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Anaheim)에서 개최된 2025 국기원 세계태권도한마당 행사에서 김 총관장은 미국 태권도 개척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 공로로 개척자상을 받으며 반세기가 넘는 헌신과 활동이 주목을 받았다. 다만 이후 국기원 측은 공식 상훈 체계에 ‘태권도 미국 개척자상’ 명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상의 공식 승인에는 선을 그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까지도 공식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969년, 김용길 총관장은 유학길에 올라
[한국태권도신문]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난 백진건 사범(1947년생)의 삶은 개인의 이력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이면, 그리고 태권도 세계화의 초창기를 함께 관통한 한 세대의 기록이다. 1970년대 초,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해외로 향하던 시기. 그는 ‘파독 광부’로 독일 땅을 밟았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는 또 다른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낯선 언어, 문화적 고립, 그리고 광산이라는 극한의 노동 환경.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태권도가 있었다. 광산의 어둠 속에서도 수련을 이어갔던 시간은 단순한 개인의 의지를 넘어 훗날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 창무관의 뿌리, 삶의 기준으로 확장되다 백진건 사범은 1963년 서울 청량리 동아체육관에서 창무관 계열 태권도에 입문했다. 고(故) 김순배 관장에게 직접 사사받은 그는 창무관 특유의 엄격한 기본기와 정신 중심의 수련 철학을 체득했다. 이 철학은 단순한 무술 수련의 범주를 넘어 그의 삶 전반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태권도는 그에게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도(道)’였으며,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