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독일에 새긴 50년, 한국인의 사명”
-백진건 사범, 이방의 땅에서 태권도로 삶을 완성하다
-“파독 광부 세대와 태권도 세계화가 만난 한 시대의 증언”
-“어둠의 광산에서 단련된 정신, 세계를 밝힌 태권도의 빛”
[한국태권도신문]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난 백진건 사범(1947년생)의 삶은 개인의 이력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이면, 그리고 태권도 세계화의 초창기를 함께 관통한 한 세대의 기록이다. 1970년대 초,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해외로 향하던 시기. 그는 ‘파독 광부’로 독일 땅을 밟았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는 또 다른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낯선 언어, 문화적 고립, 그리고 광산이라는 극한의 노동 환경.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태권도가 있었다. 광산의 어둠 속에서도 수련을 이어갔던 시간은 단순한 개인의 의지를 넘어 훗날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 창무관의 뿌리, 삶의 기준으로 확장되다 백진건 사범은 1963년 서울 청량리 동아체육관에서 창무관 계열 태권도에 입문했다. 고(故) 김순배 관장에게 직접 사사받은 그는 창무관 특유의 엄격한 기본기와 정신 중심의 수련 철학을 체득했다. 이 철학은 단순한 무술 수련의 범주를 넘어 그의 삶 전반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태권도는 그에게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도(道)’였으며,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축이었다. 독일에서도 이 원칙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 광부에서 지도자로… 전환의 시간 1967년 대한민국 공군(항공기 정비 특기)으로 복무를 마친 그는 1971년 독일로 건너가 Jacobi 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Prosper 3 광업소 용접공, Zollverein 코크스 광업소 측정·제어 설치공을 거쳐 생산과 책임간부에 이르기까지, 그는 산업 현장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 직업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용접 및 산업기술, 스팀(수증기) 전문교육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중국 연변의학원 독일분교에서 중의학을 수학하고 국제침구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이는 단순한 직업적 이력의 축적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확장해온 과정으로 평가된다. ■ 엣센에서 시작된 50년, 태권도의 씨앗을 심다 1979년, 그는 독일 보트로프(Bottrop)에 태권도 체육관을 개관하며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엣센(Essen)을 중심으로 약 50년에 걸친 지도 인생이 이어졌다. 그의 도장은 단순한 운동 공간이 아니었다.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전하는 교육의 장이었으며, 태권도를 통해 인간을 완성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술 이전에 예의와 절제, 책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교육 철학은 독일 현지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연스럽게 태권도의 현지화와 세계화로 이어졌다. ■ 제도와 공동체를 이끈 현장형 리더십 백진건 사범의 활동은 도장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독일 태권도계와 재독 한인사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재독대한태권도협회 회장(1990~1994), 독일태권도협회 심판위원장(1999~2001), 재독 광부협회 수석부회장, 에쎈 한인회 자문위원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조직 운영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CISM(세계군인태권도연맹) 독일 대표 및 경기지도자로 활동하며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도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이력은 단순한 직함의 나열이 아니라, 현장을 기반으로 구축된 신뢰와 책임의 결과로 평가된다. ■ 원칙과 정의, 흔들리지 않는 기준 그를 아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성실함, 원칙, 그리고 강한 정의감’을 말한다. 그는 상황에 따라 기준을 바꾸지 않았으며,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았다. 이는 개인적 성향을 넘어 태권도의 핵심 가치인 ‘정의’의 실천이었다. 지도자로서도 그는 분명했다. 기술보다 인성을 우선했고, 도장에서의 규율과 책임을 가장 중요한 교육 요소로 삼았다. 그의 제자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를 ‘스승’으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민자를 넘어 ‘민간 외교관’으로 그의 독일 생활은 단순한 정착이 아니었다. 태권도를 통해 한국을 알리고, 한국인의 정신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공식 외교가 아닌, 삶 자체로 이루어진 ‘민간 외교’였다. 현지인과의 결혼으로 독일에 뿌리를 내렸지만, 그의 정체성은 언제나 대한민국과 태권도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의 애국심은 제자들과 교민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 귀환, 그리고 이어지는 의미 2020년, 그는 약 반세기에 걸친 독일 생활을 마치고 대한민국으로 귀국했다. 현재 인천 영종도에서 조용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이 남긴 의미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태권도를 통하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으며 이는 하나의 문화적 계보로 이어지고 있다. ■ 기록되어야 할 이름 오늘날 태권도는 세계적인 스포츠이자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름 없이 헌신한 수많은 개척자들이 존재한다. 백진건 사범은 그중 한 사람이다. 광부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생존을 넘어 사명을 선택한 삶. 그의 50년은 개인의 성공을 넘어 대한민국 태권도가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역사다.